‘서브병’에 지독하게 걸린 사람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훑어보면 ‘서브병’이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서브 주인공, 즉 주인공이 아닌 인물에게 더 강하게 감정 이입 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로맨스 서사에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시청자들은 이야기의 중심이 될 인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인물에게 더 큰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알면서도 빠지는’ 감정을 ‘서브병’이라 부른다.
이러한 ‘서브병’을 강하게 유발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응답하라 1994>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채 ‘쓰레기’와 ‘칠봉이’라는 별명으로만 부르며, 여자 주인공인 나정의 남편이 누구인지 시청자 스스로 추리하게 만드는 장치를 썼다. <응답하라 1988>에서는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최택)’과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하며, 여자 주인공인 덕선의 남편 추리가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 인물이 ‘남편’으로 확정되는 순간, 다른 인물은 자연스럽게 ‘서브 남자 주인공’이 된다.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두 인물 모두에게 충분한 서사와 매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감정’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특정 인물을 지지했던 시청자들은 아쉬움과 미련을 느끼게 되고, 이는 곧 ‘서브병’으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감정이 일회성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결말을 알고 다시 작품을 정주행할 때조차, 시청자들은 여전히 같은 인물에게 마음이 기울고, 같은 결말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빌런도, 서브 커플도, ‘최애’도 — 분산되는 시선
주변 인물에 대한 관심은 ‘서브 주인공’에서 그치지 않는다. 빌런, 조연 커플, 심지어는 군중 속 단역까지 대중의 시선은 폭넓게 분산된다.
대표적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로키’는 원작에서 빌런으로 등장했음에도, 높은 인기에 힘입어 단독 드라마 시리즈까지 제작되었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배우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 역시 ‘레전드 빌런’으로 자리 잡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좋아하는 악당’이라는 개념은 이제 하나의 문화적 취향이 된 셈이다.
로맨스 서사에서도 시선의 분산이 나타난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하나의 중심 커플 대신 여러 조연 커플의 서사를 동시에 풀어나가는 구조로, 각 커플마다 고유한 서사를 부여했다. 또한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저승사자와 써니 커플이 큰 인기를 끌며, 주인공 커플 못지않은 지지를 얻기도 했다. 이처럼 시청자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커플을 선택적으로 응원하는 양상을 보인다.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과 <귀멸의 칼날>은 방대한 캐릭터 수만큼 팬들마다 ‘최애’ 캐릭터가 뚜렷하게 나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일부 캐릭터는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상을 남기며, 주인공 못지않은 큰 인기를 얻기도 한다.
내 취향, 내 감정대로 — 선택적 몰입의 심리학
시청자가 특히 ‘빌런’에게 끌리는 데에는 일부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주인공에게는 오히려 공감의 여지가 좁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결점 있는 빌런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더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그림자 자아(Shadow Self)’로 설명한다. 사회적으로 억압된 욕망이나 감정을 콘텐츠 속 캐릭터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시청 방식의 변화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작용한다. OTT 플랫폼의 확산과 드라마나 영화의 특정 장면이 릴스나 쇼츠로 재가공되면서, 시청자들은 특정 장면이나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소비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외 다양한 인물에게도 관심을 주게 된다. 이제 작품은 소수의 주인공보다 여러 인물이 만들어 내는 관계와 이야기의 결합체로 소비되는 것이다. 그 결과,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의 서사에도 깊이 몰입해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또한 최근 콘텐츠에서는 조연 역시 독립적인 서사와 감정선을 가지며 주인공과는 또 다른 이야기의 축을 형성한다. 특히 로맨스 서사에서 시청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인물과 관계를 선택적으로 응원하며, 기존의 ‘정해진 결말’과는 다른 감정선을 형성한다.
SNS와 팬덤 문화는 이러한 선택적 지지를 더욱 강화한다. 시청자들은 애착을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공식 설정에 없는 캐릭터 간 조합을 상상하는 ‘커플링’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아가 팬픽과 같은 2차 창작을 통해 원작의 서사를 확장하기도 한다.
시청자들의 서브병, 빌런 소비, 서브 커플에 대한 지지 등은 모두 같은 흐름 속에 있다. 시청자는 더 이상 ‘정해진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카메라가 주인공을 비추는 동안에도, 관객의 눈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
김채현 기자 kchchbb@naver.com
[참고]
https://www.mbn.co.kr/news/life/5179259